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누구나 살아 가면서 추억을 갖고 살겠지만, 그래도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밤늦은 시간 이 글을 쓰면서 수석에 얽힌 추억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1984년 첫 직장을 잡고 무더운 여름날 퇴근길에 돈암동 소방서 앞 정류장에서 집에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눈 앞에 수석가게 간판이 보이고 가게 앞 돌무더기에서 돌을 고르시는 사장님을 목격하고선 수석이 무엇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어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길을 이끌었다. 그 당시 2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나는 처음 보는 수석에 완전히 매료되어 세포 알알이 전율이 쏠려 다니고 있었다. 나는 사장님이 선별하고 계시는 돌무더기에서 마음에 드는 돌 한점을 7,000원에 구입하고 신문지에 곱게 싸서 귀가 하였다. 그 당시 구입한 수석은 지금은 내 품을 떠났지만 하진 쵸코석이다.
그 당시 성북경찰서와 이웃하고 있는 돈암동, 보문동, 안암동 일대는 수석가게 대여섯군데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수석계의 원로이신 백남경님이 운영하신 한국석심회 등 이른바 장안의 수석 메카였다. 85년 정초 장위동으로 발령을 받아 자리를 옮겼는데 이게 웬일인가 파출소 옆옆집이 수석가게 아닌가, 지금은 수석계의 원로로서 몇 해전 강북수석회 회장을 역임하신 박호성 선생이 운영하신 "애석원"이었다. 나는 이런 환경적인 여건이 내가 수석에 입문하게 된 필연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당시 장위동에는 전현직 별이 32개나 사는 아주 부자 동네였다. 5공 주역인 노재현 국방부장관, 황영시 감사원장 등등,... 당시 수석인들은 대부분 나이가 50대 이상 이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었다. 수석은 선택받은 사람들이 즐기던 고급 취미생활 이었다. 그런 이유인지 장위동, 석관동 일대엔 수석가게와 수석회가 제법 많이 있었고 수준이 상당히 높은 지역 이었다. 그해 5월 나는 처음으로 탐석을 따라 나섰다. 애석원 박호성 사장님을 비롯해 예닐곱명과 봉고차에 동승하여 목계로 향하였다. 중간에 앙성터미널에 들러 아침식사를 하고 식당 아주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싣고 돌밭으로 향했다. 그것이 늘 탐석을 갈때마다 아침의 일상이었다. 20대 중반의 나는 수석인들의 아들뻘 되는 어린 나이로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행복한 시절이었다.... 엄격한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는 교육계의 통설이 있듯이 나는 나의 싸부님 박호성님을 비롯해 주위 수석인들로 부터 혹독하게 수석을 배우며 익히곤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훌륭한 제자는 커녕 항상 제도권을 이탈하여 변방에서 놀고 있으니 그 통설을 뒤집어 놓은 놈이다. 그래서 항상 찌그러 지고 일그러진 나의 수석생활 여정과 비슷한 이미지인 "양철통"이라는 닉네임을 쓰다가 덕소 아우님들의 강력한 경고와 협박으로 지금 쓰고 있는 양정으로 개명을 했다. 나의 싸부님한테 항상 미안하고 그분을 생각하면 존경심이 발로하지만 가슴 한켠 아련해 진다. 그 당시 돌밭에서 선배 수석인들은 "이제 충주댐도 담수가 되기 시작하고 상류에서는 더 이상 탐석할 곳이 없어져 수석도 이제 끝이야"라며 자조섞인 한숨을 듣곤 했다. 당시에도 돌밭에서 한점을 하려면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여건 이었다. 당시 순경 말단 봉급이 15만원 밖에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한 나는 단체 탐석비 2만원을 아끼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일주일 마다 나가는 단체 탐석이 너무 길게 느껴졌고 처음 시작한 수석 취미가 불이 붙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동마장터미널에서 충주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새우잠을 자며 목계와 조타골로 나 홀로 탐석의 길에 오르곤 했다. 다행히 충주 앙성 조치골 입구 동네가 장모님 고향으로 처가집 일가친척들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곤 했다. 지금도 80이 넘으신 어르신들은 장모님한테 양서방 요새 돌 주으로 않오냐는 안부를 받곤 한다. 86년도 드디어 돌밭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개발의 붐으로 남한강에도 골재채취장이 이곳저곳 생겼났다. 나는 돌밭까지 가야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기 위해 한편 연고감이 있는 조타골을 집중 공략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작업장 감시원의 매서운 눈초리도 없었고 말만 잘하면 덤프트럭 기사가 돌밭까지 태워다 주었으며 포크레인 기사가 한 바가지를 떠서 바닥에 깔아 주는 등 사람들의 인정을 느끼면서 탐석을 했었다. 80년대 후반은 충주호가 담수가 되면서 탐석 할 돌밭이 사라지고 공급이 전보다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으로 수석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진 풍경을 연출했다. 당시 목계지서에 근무하는 은순경은 석상들로 부터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전문가인 것 처럼 내게 " 양형 몇년 있으면 돌값이 엄청 치솟을 것으로 예상 되는데 돈이 있으면 수석에 투자를 해보라"는 권유를 말딴 공무원의 비애로 치부하며 막걸리 한잔의 취기에 털털 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맡기곤 했었다. 그 후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미사리, 한탄강, 영평천, 수하리 등 수석의 변방 산지 위주로 눈을 돌려 지끔껏 탐석활동을 해오고 있다. 최근 4대강 사업으로 여주에 보가 3개나 건설되면서 부론 밑 남한강 하류의 돌밭이 수장되면서 수석인들의 한숨과 자조섞인 말들을 들으며 이제 수석도 끝인가 하는 생각에 행복으로 시작된 수석생활이 불행으로 끝나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도 있지만 다행히 팔당 끝자락 동네 덕소에 살면서 젊은 수석인들과 친구가 되어 다시 행복한 수석 생활을 이어 가고 있으니 불행중 다행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정열을 불 태우고 있다. 친구들아 " 조급해 하지 마라, 돌밭에 돌이 없는게 아니라 우리가 못 찾을 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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